향파와 소파
어린이를 향한 무한한 사랑은
두 사람의 인연으로 오래도록 이어졌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 아래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보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자 
아동문학가, 사회운동가, 예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향파 이주홍과 소파 방정환.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 특별전 

< 향파와 소파 > 코너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험난한 세상 속에서 가난에 굶주리고 

인격적인 대우를 못 받던 어린이를 위해 
향파와 소파가 실천한 어린이를 향한 사랑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어른은 누구보다 어린이를 깊이 이해했고 

사랑하는 마음이 같았기에, 
시간이 흐른 후에도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은
그 인연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향파와 소파

어린이날의 시작


어린이날의 시작은 3·1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의 열기는 전국 각지에 수십 개의 소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에서 방정환, 김기전이 중심이었던 ‘천도교 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 창립 1주년을 맞아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했다.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는 전단을 배포하며 나라의 미래, 나라의 희망이 될 어린이를 귀중히 여기자고 선전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천도교 소년회 단독의 활동으로는 범사회적인 운동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방정환은 1923년, 서울 시내 40여 개의 소년단체를 연합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했고 그해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애녀석, 아해놈, 어린애’라고 부르며 단순히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돕게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도록 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방정환은 어린이를 귀히 여기자는 취지로 어린이날을 제정, 선포하게 된 것이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1923년에 창간한 어린이 전문 잡지 『어린이』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어린이’를 ‘늙은이’나 ‘젊은이’처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첫 시도였다.

소파가 어린이날을 선포했을 때
향파는 고향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며 

신문과 잡지를 발행했다. 

‌‌이주홍 회고록에는 소년 시절의 문학 활동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개벽』을 모방하여 『삼우』, 『형제』, 『신소년』이라는 회람잡지를 만들었고, 『자양일보』라는 필사본 단면 신문을 만들어 동네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동무들과 춘향전 연극을 하며 연출은 물론 직접 주연(이도령 役)을 맡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아울러 ‌‌『동아일보』, 『신소년』에 습작품을 꾸준하게 투고하며 문학가의 꿈을 키웠는데 향파의 다재다능한 재능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싹트고 있었다.

‌이후 이주홍은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했고, 히로시마에서 ‘근영학원’을 설립하여 교포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여담으로 향파는 소년 시절에 잡지 『신소년』을 만들었는데,‌ 동명의 잡지가 실제로 서울에서 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라고 신기했다고 한다. 향파 역시 훗날 『신소년』사에 취직했으니 실로 의미심장한 우연이라 하겠다.



향파와 소파

향파 이주홍과 소파 방정환의 첫 만남


1929년 일본에서 돌아온 향파는 
신영철 선생의 소개로 방정환 선생을 만났다.


『개벽』 편집부에 근무하던 신영철 선생은 개벽사에 드나들던 방정환, 이정호, 이태준, 최경화, 박영희, 염상섭 등의 당대 최고의 문사들을 이주홍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이주홍과 방정환은 처음 만나게 되는데,‌ 당시 24세였던 향파는 동화「배암 새끼의 무도」로 막 등단한 신인 작가였고 소파는 31세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던 어린이 운동가였다. ‌‌
‌‌향파는 소파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숨 쉬는 것만도 겨웁게 보이도록 뚱뚱한 체격이었다.
 ‌『어린이』의 글만 쓰는 게 아니라
 때때로 교회당에다 ‌소년들을 모아 놓고 
 동화를 들려주는데 그 구연의 기술이 기가 막히더라고
 신영철 선생도 설명해 주었다.”

 「아동문학이 싹 트던 무렵의 편편담」『한국아동문학』(1982)

< 아래의 이미지를 누르시면 해당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향파와 소파

소파의 『어린이』와 향파의 『신소년』


‌초창기 근대 아동문학을 개척하다

한국의 ‘어린이 잡지’는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주재한 『소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샛별』, 『붉은 저고리』가 발행되고, 1913년 창간한 『별나라』에서 이광수가 소년을 주제로 글을 게재하지만, 당시 ‘소년’이라는 단어는 어린이가 아니라 ‘청춘 남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1923년 3월 1일 소파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야말로 명실상부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 잡지라 하겠다.

같은 해 10월에는 신명균이 주간한 『신소년』이 발행되고, 뒤이어 『별나라』(1913년 창간한 것과는 다름), 『아이생활』이 발간된다. 이 4대 소년 잡지는 당시 ‘소반 다리처럼 네 군데에서 버티었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표적인 어린이 잡지였다.


1929년 향파는 동화로 등단했던 『신소년』의 편집자로 자리 잡게 된다. 향파는 이 시기를 회고하며 ‘맨발의 편집자’ 시절이라고 했는데, 월급은 없고 밥은 사주(社主) 이중건의 집에서 먹고, 잠은 잡지사에서 잤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 향파는 여러 필명을 사용하여 작품 발표는 물론 표지부터 삽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혼자 도맡아 했다.
 
소파의 『어린이』와 향파의 『신소년』은 ‌당시 대표적인 어린이 잡지로서 어린이의 동심을 지켜주고 교육과 교양을 쌓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두 잡지는 창간과 종간의 시기 역시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1923년     3월 ~ 1935년      3월 『어린이』
‌1923년  10월 ~ 1934년  4·5월 『신소년』


‌‌『어린이』와 『신소년』의 이른 종간은 경영의 어려움을 비롯하여 집요했던 일제의 검열과도 밀접한 인과관계가 있다.



향파와 소파

어린이날 준비 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다


< 중외일보 > 1930년 4월 1일 6면에는 ‘경성소년연맹’에서 ‘소년단체 대표자 연합회의’를 열고 어린이날 준비 위원을 정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어린이날 준비 위원 명단에 방정환과 함께 이주홍이 있다. 이는 두 어른이 첫 만남 이후 뜻을 같이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소년운동단체’ 강제 해산 명령으로 어린이날 행사가 16회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행사가 재개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5일에 이르러서다. ‌


< 중앙신문 > 1946년 3월 11일 2면에는 ‘어린이 명절 5월 5일, 10년 만의 부활’이라는 제목 아래 어린이날 행사를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해방 후 어린이날 명절을 되찾고자 전국적으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는 내용으로 준비 위원 명단에 이주홍 선생이 있다.



향파와 소파

‘방정환 전집’ 편집 위원으로 활동하다


이주홍 문학관 자료실에는 근현대 문단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많이 있다. 그중 흥미로운 신문 기사가 있다.

향파는 소파의 장남 방운용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방운용이 부친의 글을 모두 모아 책을 편찬하려고 하는데 참고가 되는 자료를 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향파는 방운용이 부친과 다름없이 어린이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여 도움을 주고자 했다.

방정환 전집은 『소파전집』(박문서관, 1940)을 시작으로 대략 12회에 걸쳐 간행되었는데‌ 향파가 편집 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모두 여섯 번이다.‌ 방운용은 부친의 전집을 다섯 차례 엮었는데 그중 네 번을 향파와 같이 작업했다.

이렇듯 향파가 『소파아동문학전집』 편집 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한국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그 공로는 매우 크다 하겠다.

『소파아동문학전집』(삼도사, 1965)


국판에 각 권 200∼250면 안팎인 5권짜리 전질형 전집으로 편찬되었는데, 박문서관의 『소파전집』과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 분량의 작품을 수록했다.

편집위원으로는 마해송, 이주홍, 이원수 등 아동문학 작가 세 명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방정환의 거의 모든 저작을 망라하여 수집했다고 보고 “소파 문학의 결정판(決定版)”을 냈다고 자부했다.

『소파방정환문학전집』(문천사, 1974)


삼도사 전집 이후 약 10년 만에 새로 편찬된 문천사의 이 전집은 원문 대조를 더욱 엄밀히 하였으며, 필명 추적의 방법을 통해 많은 자료를 새로 발굴해 수록했다.

문천사 전집의 편집위원이었던 이원수, 이주홍, 이재철은 방정환 문학 전집의 '결정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단순히 방정환의 저작을 총망라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빠지거나 틀린 것이 거의 없는 바른 책, 꼼꼼한 원문 대조를 통해 ‘정본(定本)’을 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향파 이주홍이 편집 위원으로 참여한‌‌‌ ‘방정환 전집’ 목록

1965

   『소파아동문학전집』(삼도사, 전 5권)
       
엮은이 : 방운용 / 편집 위원 : 마해송, 이주홍, 이원수‌

1966
   『소파아동문학전집』(동양출판사, 전 5권)
       편집 위원 :  마해송, 이주홍, 이원수, 윤석중, 한인현

1970

   『소파아동문학전집』(덕영문화사, 전 5권)
       편집 위원 :  마해송, 이주홍, 이원수, 윤석중, 한인현

1974
   『소파방정환문학전집』(문천사, 전 8권)
       엮은이 : 방운용‌  /  편집 위원 : 이원수, 이주홍, 이재철

1977

   『방정환문학전집』(문천사, 전 6권)
‌‌‌‌ 
     엮은이 : 방운용  /  편집 위원 : 이원수, 이주홍, 이재철

1981

   『방정환문학전집』(문음사, 전 10권)
‌‌‌‌‌‌      엮은이 : 방운용  /  편집 위원 : 이원수, 이주홍, 이재철

[이미지 출처]‌
이주홍문학관 소장자료 제외한 외부자료 순차적 기명

[출처: (사)방정환연구소] 방정환 사진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十年後朝鮮(십년후조선)을慮(여)하라. (1922.05.01.) 동아일보.
오늘,어린이날. (1923.05.01.). 동아일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京城少盟(경성소맹)에서 어린이날 準備(준비). (1930.04.01.). 중외일보.
第七回(제칠회)로擧行(거행)될 어린이날準備(준비). (1930.04.04.). 조선일보, 2면.
어린이名節(명절) 五月五日(오월오일), 十年(십년)만에 復活(부활). (1946.03.11.). 중앙신문.